지난 여름 오사카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오사카 성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그 웅장함에 잠시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빛 지붕과 거대한 돌로 쌓아올린 성벽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도요토미의 꿈이 빚어낸 요새
158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440년 전의 일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성을 세우기로 했다. 그가 자리로 점찍은 곳은 바로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중요했던 오사카였다.
사실 이 성을 짓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떻게 현대 기술도 없이 100톤이 넘는 바위를 옮기고 쌓았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성벽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그 크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가이드는 이 바위들이 일본 각지에서 배로 운반되었다고 설명했는데, 히데요시의 강한 영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난 일본 노인은 "히데요시가 이 거대한 돌을 쌓은 이유는 단 하나, 적에게 '감히 도전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지"라고 말했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성 곳곳에 숨은 이야기들
오사카 성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천수각이다. 밖에서 보기엔 5층이지만 실제로는 8층 구조로, 안에 들어가보면 그 넓이에 놀라게 된다. 각 층마다 전시물이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지붕 장식이었다. 끝부분에 달린 금빛 물고기 장식(시마즈)은 불이 나면 물고기가 뛰어내려 불을 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실제로는 번개를 막는 피뢰침 역할도 했다니, 옛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다.
성 주변을 둘러싼 해자도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연꽃이 피어있어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예전엔 적군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을 테다. 해자를 건너려다 빠져 죽은 병사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한여름에 방문했던 나는 해자 주변 벤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생각했다. '겨울에 오면 또 어떤 모습일까? 눈 덮인 오사카 성은 또 다른 매력이 있겠지.'
수난의 역사
오사카 성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새로운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박물관에서 본 영상에 따르면,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은 가까스로 성을 지켜냈지만, 이듬해 '여름 전투'에서 결국 무너졌다고 한다. 당시 도쿠가와군은 해자를 메우기 위해 인근 민가의 문과 벽을 뜯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쟁의 잔혹함을 새삼 느꼈다.
더 놀라운 건 이후의 역사다. 천수각이 불에 타고, 번개에 맞고, 메이지 유신 때는 또다시 불타는 등 온갖 수난을 겪었다니... 지금 우리가 보는 건 1931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오사카 성이 마치 일본 역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견뎌낸 노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오사카 성, 그 이중성
오사카 성의 매력은 외관과 내부의 이중성에 있다. 밖에서 보면 400년 전 모습 그대로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최신식 박물관이 펼쳐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히데요시라면 이런 편리함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8층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오사카 시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현대식 고층 빌딩들 사이에 자리한 오사카 성은 마치 시간의 틈새에 존재하는 듯했다.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에 잠시 몽환적인 기분마저 들었다.
전시관에서는 옛 무사들이 사용했던 갑옷과 무기를 볼 수 있었다. 한 갑옷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걸 입고 전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니 존경심이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조금만 더워도 불평하는데 말이다.
사계절의 오사카 성
오사카 성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해 분홍빛 세상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공원 곳곳에 심어진 벚나무가 3천 그루나 된다니 그 광경은 상상만 해도 환상적이다. 일본인 친구는 "벚꽃 시즌에 야간 라이트업된 오사카 성은 이세상 풍경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내가 방문했던 여름에는 녹음이 짙었고, 매미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서 쉬는 현지인들,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한 구석에선 유카타를 입은 여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일본스러워서 눈길을 끌었다.
가을엔 단풍이, 겨울엔 설경이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계절에도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오사카 성 즐기기
오사카 성을 제대로 즐기려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나는 성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위치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특히 해자 건너편에서 보는 전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점심때가 되니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그들처럼 나도 근처 편의점에서 주먹밥을 사서 벤치에 앉아 먹었는데, 그 소박한 한 끼가 여행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오사카 성 박물관 내부의 전시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특히 전투 장면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디오라마 앞에서는 오랫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치 타임슬립한 기분이 들 정도로 실감났으니까.
팁을 하나 주자면, 입장권을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하는 게 좋다. 나는 현장에서 30분 넘게 줄을 섰는데,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여름에 방문한다면 물과 부채는 필수다. 성벽을 오르내리다 보면 더위에 지치기 쉽다.
마지막 인상
오사카를 떠나는 날, 호텔 창문으로 멀리 보이는 오사카 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 자리를 지켜온 성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될까?'
일본 여행 중 많은 곳을 둘러봤지만, 오사카 성만큼 역사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오사카 성은 내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음에 오사카를 찾게 된다면, 난 또다시 이 성을 찾아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그리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성벽 위에 앉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